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문단 편집) === 동서군 분열과 세키가하라 ===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도요토미 정권은 정권 핵심 인물들(십인중)에 의한 합의 체제로 운영되었다. 이 시기 히데아키는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도요토미 일문으로서 고다이로에 준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일례로, 덴노의 퇴위 의사를 알리는 칙사 파견의 대상에 대하여 쿠죠 카네타카(九条兼孝)가 일기에 기록한 것을 보면 도쿠가와, 마에다 등 고다이로와 함께 히데아키에게 칙사가 보내졌다고 나온다. 또한 이에야스의 참내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에야스의 뒤를 이어 히데이에, 히데아키가 봉헌한 것을 언급하고 타 다이묘들의 봉헌을 기록하여 히데아키의 위치가 여타 다이묘들 이상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도요토미 정권 내부는 점차 혼란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시다 미츠나리]]와 마에다 겐이, 마시타 나가모리, 나츠카 마사이에(도요토미 삼봉행), [[고니시 유키나가]]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호소카와 타다오키]], 아사노 요시나가[* 아사노 나가마사의 아들.] 등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오대로 사이에서도 1인자라 할 수 있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 [[모리 테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우에스기 카게카츠]] 사이의 갈등이 격발되었다. 두 갈등은 서로 얽히게 되어, 구로다, 후쿠시마, 아사노, 가토, 호소카와 등이 도쿠가와가 연합하고 이시다, 봉행중, 고니시와 반 도쿠가와 파가 연합하는 형세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 역시 확실한 적대 양상이었던 것은 아니어서, 삼봉행과 테루모토는 이에야스에게 협력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하였고, 마에다 토시나가의 주도에 의하여 벌어졌다고 생각되어 이에야스가 카가 침공을 준비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던 이에야스 암살 미수 사건 당시에는 미츠나리조차도 이에야스에 협력하였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히데아키는 특정 진영에 속하여 움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1600년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토벌하기 위하여 군을 이끌고 동진하자, 오사카 일대에서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테루모토, 도요토미 삼봉행과 이시다 미츠나리는 거병하였다(아이즈 정벌과 서군 거병). 히데아키는 이 시점에 서군에 가담하였고, [[토리이 모토타다]]가 지키고 있던 후시미 성을 공격하는 데 주력으로서 군을 이끌고 참여하는 한편 다이고, 오츠, 야마시나 등 기나이의 요충에 군을 전개, 해당 지역들을 제압하였다. 적어도 서군 거병 초기에는 히데아키는 오사카측의 주력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이후 히데아키의 정확한 움직임은 명확치 않다. 확실한 것은 이 시기 히데아키에게 동군 측에서 접근해온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구로다 나가마사와 아사노 요시나가가 있다. 이들은 동군이 키타노만도코로 네네를 위하여 싸우고 있다고 주장하며 히데아키에게 에도측으로 돌아설 것을 요청하였다. 히데아키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동군에 가담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이 이루어진 시점이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세키가하라 전투|세키가하라의 본 전투]] 이전이라는 것만에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음력 9월 15일, 세키가하라에서 동서군이 격돌하는 결전이 벌어졌다. 시라미네 쥰(白峰旬) 박사의 당대 서장, 일기에 근거한 연구에 의하면, 당일 히데아키와 오사카측, 에도측의 움직임은 다음과 같다. 1. 히데아키의 에도측 가담을 오사카측이 확인, 오가키 성을 나와 히데아키의 토벌에 나섬. 2. 이에야스, 오사카측을 쫓아 세키가하라로 진군. 3. 개전. 히데아키, [[오오타니 요시츠구]]를 격파. 에도측과 함께 오사카측에 맹공. 4. 정오경, 오사카측 궤멸. 2시간만에 세키가하라 전투 종결. 결전 후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에게 오사카측을 격파하는데 크게 공헌한 것에 대하여 감사받으며 그 자식인 히데타다에 맞먹는 대우를 약속받았다. 그 뒤 미츠나리의 본거지 사와야마를 공격하는데 참여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를 보여주는 1차 사료는 없다. 문서상에 나타난 히데아키의 이후 행적은 우키타의 본거지인 비젠 공격이다. 일전 우키타 소동 때 우키타 히데이에와 반목한 비젠의 무사들을 포섭한 히데아키는 전 우키타령을 무난하게 접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